- 저자
- 샤를 단치
- 출판
- 이루
- 출판일
- 2013.04.03
2021년 7월의 마지막 날,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조용한 방 안,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손에 잡히는 순간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힌 책. 읽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두 시간. 분량은 250쪽 정도. 결코 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볍게 읽혔다는 점에서 얇다고 느껴졌던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장을 넘기며 어떤 감정의 깊이를 마주하게 되었고, 이 글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종종 마음의 진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동은 누구에게라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강한 충동이 된다. 이 책이 그랬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프랑스 작가 샤를 단치. 하지만 책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내가 그를 몰랐던 것은 단지 지식의 범위가 닿지 않았을 뿐, 그의 글은 너무도 날카롭고, 동시에 유머러스했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종종 듣는 입장에만 머무른다. 상대의 말에 반박할 수 없거나,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있었을 것이다. 독서는 그런 의미에서 나와 상대방의 대화이며, 때로는 일방적인 대화다. 읽는 이는 듣고, 말하는 이는 말한다. 하지만 샤를 단치의 책을 읽으며 나는 말문이 트였다. 그와 대화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고, 책장을 덮자마자 쓰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그렇게 자신감을 되찾았다. 어떤 책은 나를 말하게 하고, 또 어떤 책은 나를 침묵하게 한다. 이 책은 전자였다.
책 속 한 구절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는 말했다. "사색이야말로 독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장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독서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피리 부는 사람 앞에 놓인 뱀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신랄하고도 통찰력 있는 비유인가. 우리는 피리 부는 사람의 손짓과 소리에 이끌려 움직이는 뱀과 다를 바 없는 독서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채, 누군가 권한 책을 그냥 읽는다. 그것이 독서일까? 아니면 세련된 소비일까?
샤를 단치의 글은 일종의 서평 모음집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이 책은 이렇더라" 수준을 넘어서 있다. 그의 평론은 하나의 독립된 문학작품 같았고, 문장 하나하나에서 뚜렷한 주관이 느껴졌다. 때로는 오만하게 느껴질 만큼 자신감이 넘쳤지만, 바로 그 자신감 덕분에 글은 힘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그는 단순한 독서광이 아니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색가였다. 그러한 글쓰기에서 우리는 문학의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인상 깊었던 또 다른 표현은 다음과 같았다. "청각은 시각보다 주의력이 떨어진다. 귀는 모든 소리에 열려 있지만, 눈은 주시하는 대상에만 집중한다. 구어는 과장되고 원색적인 대신, 문어는 건조하고 함축적이다." 이는 낭독이라는 행위를 은근히 조롱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듣는다는 행위가 과연 인지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귀는 나비와 같다고 했다. 여기저기 팔랑팔랑, 집중하지 못한 채 떠다닌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읽음 속에서 자율적인 사유가 뒤따라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읽지 않은 지 오래되었음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셰익스피어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고, 청소년기 이후 문학은 그저 책장 한편의 장식이었다. 부모님이 사두신 전집 중 몇 권을 어쩌다 읽었을 뿐. '혈의 누'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통속적인 문학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문학에 무지한 것을 굳이 반성할 생각은 없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젊을 때 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것. 늦었다고 느끼는 지금, 그때 읽지 않았던 책들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문학은 시간과 경험이 더해질수록 다르게 읽힌다. 그렇기에 젊은 날의 문학 독서는 더 깊은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의 진정한 상속인은 독자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우리는 작가가 남긴 글을 통해 정신을 유산처럼 물려받는다. 그것이 바로 책이다. 이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독서를 해야 하고, 더 깊은 사유를 해야 한다. 피동적인 독서가 아닌 능동적인 탐구로서 책을 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히 눈으로 따라가는 독서가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함께 읽는 독서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 또한 독서 태도를 바꿔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책의 또 다른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감각적인 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라디오 청취자들은 매혹적인 목소리의 포로가 되지만, 독자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다." 얼마나 정확한 분석인가. 우리는 누군가의 말이나 영상에 쉽게 사로잡히지만, 책을 읽는 행위만큼은 오롯이 우리의 것이다. 나의 시선, 나의 속도, 나의 해석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책 읽기의 본질이다.
책은 친절하지 않았다. 요즘 책들처럼 독자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었다. 마치 프랑스식 유머처럼, 낯설지만 매혹적인 문장들이 이어졌다. 작가의 개성이 강했기에 오히려 더 몰입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정서와 문화가 배어 있었기에, 그것마저도 하나의 읽을거리였다. 독서는 잡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이 책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좋은 책만이 아닌, 나쁜 책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의 안목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2달 전 읽었던 한 책은 목차와 머리말만 보면 너무 읽고 싶게 만들었지만, 막상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표지와 목차는 예술이었지만, 본문은 짜깁기의 향연. 인터넷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제목은 유혹적이었지만, 실상은 허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책을 고르는 안목이 필요하다. 샤를 단치처럼 개성이 뚜렷한 저자를 만나면, 그 자체로 책의 가치가 높아진다.
W. H. 오든이 '글쓰기 Winning'에서 말한 것처럼, 나쁜 책에 열광하는 것은 속물적이라는 지적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나쁜 책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고 믿는다. 어떤 책은 실망감을 주지만, 그것 또한 경험이다. 좋은 책이 주는 기쁨만큼이나, 나쁜 책이 주는 실망도 나를 성장시킨다. 책을 통해 얻는 것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삶의 태도다.
샤를 단치는 말했다. "독자는 위선을 아주 잘 간파한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이는 위선을 경계해야 한다. 글쓰기에서 진정성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위선적인 글은 독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반성하게 된다. 내가 말한 것과 실제가 다르지는 않은가. 나의 글이 독자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 결국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성찰이자, 성장의 과정이다.
"글 쓰는 것이 기술이 아닌 것처럼 읽는 것도 기술이 아니다." 샤를 단치의 이 말은 글쓰기와 독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기술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마음이다. 감정이고, 열정이며, 성찰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읽어야 하고, 계속해서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구절이 있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으면 인류는 자연으로 되돌아가 짐승들과 함께 살 것이다. 그리고 미개하고 착하고 순한 독재자가 곳곳에 설치된 총천연색 화면들 속에서 미소를 지으리라!" 얼마나 강렬한 메시지인가. 책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은 [왜 책을 읽는가] - 샤를 단치. 프랑스의 저자와 한국의 번역가가 함께 만들어낸 한 편의 작품이었다. 번역자 임명주 님의 노고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번역이 잘 되어 있었기에 나는 이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사유할 수 있었으며,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작가, 번역가, 독자,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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